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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가 최종 순위표에서 낯익은 이름 하나가 3위 자리에 올라 있는 걸 최근 확인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다음으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보다도 높은 자리에 비야레알 CF가 있었습니다.
이 정도 성적을 낸 구단이면 모기업 자금력이 상당하겠거니 짐작했는데, 알고 보니 연고 도시 인구가 5만 명 남짓한 소도시 구단이었습니다.
현직 마케터 입장에서 이런 구단은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서 자료를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비야레알 CF는 2025-26시즌 라리가에서 22승 6무 10패, 승점 72점으로 3위를 기록하며 2026-27시즌 UEFA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권을 따냈습니다.
구단 연고지인 비야레알(카스테욘주)의 인구는 5만 1,000명 남짓으로, 홈구장 에스타디오 데 라 세라미카의 수용 인원(약 2만 3,000명)이 도시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는 구조입니다.
스페인 프로축구 역사에서 이 정도로 작은 도시가 이만큼 꾸준히 빅클럽들과 경쟁해온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구장 이름부터 남다릅니다.
에스타디오 데 라 세라미카(직역하면 “도자기 경기장”)이라는 이름은 2017년 1월, 바르셀로나 원정 경기를 앞두고 기존 이름 “엘 마드리갈”을 대체하며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 작명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보통 스타디움 네이밍라이츠(시설에 기업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리)는 한 기업이 거액을 지불하고 자기 브랜드명을 다는 방식인데, 비야레알은 연고지 카스테욘주의 핵심 산업인 타일·도자기 업계 기업 7곳(파메사, 포르셀라노사, 아르헨타 세라미카가 메인 스폰서, 타우 세라미카·베스타일·에스말글라스-이타카·콜로롭비아가 공식 스폰서)이 함께 참여하는 방식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후 페로, 토레시드 같은 기업이 메인 스폰서 대열에 추가로 합류했고, 자재 공급업체 등을 포함한 공식 파트너까지 더하면 스폰서 명단이 십수 개 기업으로 늘어납니다.
카스테욘주는 스페인 타일 생산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산업 클러스터인데, 그 지역 산업 전체가 구장 이름값을 나눠서 지불하는 구조인 셈입니다.
이 이름값이 단순한 간판 이상이라는 것도 눈에 띕니다.
2022년 구단 100주년을 맞아 진행한 3,500만 유로(건축설계사 IDOM 설계) 규모의 리노베이션에서, 구장 남쪽 스탠드 외벽 전체를 노란색 고광택 도자기 타일로 마감했습니다.
500개가 넘는 LED 조명이 이 타일 외벽을 밤마다 비추는데, 실제로 밤에 구장 외벽에 큼지막하게 “ESTADIO DE LA CERÁMICA”라는 글자가 조명으로 빛나는 모습을 구단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구장 자체가 지역 산업을 알리는 광고판이자 랜드마크로 설계된 셈입니다.
관중과 티켓
에스타디오 데 라 세라미카의 공식 수용 인원은 2만 3,173명입니다(구단 홈페이지 기준).
2024-25시즌 라리가 홈경기 평균 관중은 1만 8,267명으로, 좌석 점유율로 따지면 80% 안팎입니다.
빅클럽들에 비하면 절대 관중 수는 적지만, 도시 인구 5만 1,000명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매 홈경기마다 도시 주민 세 명 중 한 명꼴로 구장을 채운다는 뜻이니 지역 밀착도로는 오히려 최상위권입니다.
시즌권 가격은 연령·좌석 등급에 따라 120유로부터 630유로까지 폭넓게 형성돼 있고, 낱장 티켓은 최저 25유로부터 시작해 좋은 자리는 40~70유로대까지 올라갑니다.
원정 팬 좌석은 폰도 노르테(북쪽 스탠드) 최상단에 배치돼 있는데, 해외의 한 축구 여행 전문 사이트가 남긴 원정 관람 후기를 보면 좌석은 경사가 가파르고 높은 자리지만 지붕이 완전히 덮여 있어 시야가 의외로 괜찮다는 인상, 홈팬들이 먼저 악수를 건네고 행운을 빌어줄 정도로 텃세 없이 따뜻하게 맞아준다는 인상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대도시 빅클럽 원정과는 결이 다른, 소도시 특유의 환대 문화가 관람 경험의 일부가 된 사례로 읽힙니다.
구단은 최근 프리미엄 관람 상품도 새로 선보였습니다.
‘매치 그록 익스피리언스’와 ‘미트 앤 그록’이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회당 참가 인원을 10명 안팎으로 제한한 대신 선수단이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 사인·사진을 받을 수 있게 구성했고, 가격은 1인당 75유로에서 275유로 사이입니다.
대규모 관중보다는 밀도 있는 소수 인원 대상 고가 상품으로 객단가를 높이는 전략인데, 관중 규모 자체를 키우기 어려운 소형 구단이 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수익 모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2017년 12월 비야레알 대 FC바르셀로나전, Wikimedia Commons(Frank94Rock, CC BY-SA 4.0)
공간 활용과 F&B
2022년 리노베이션으로 구장은 모든 관중석을 하나의 지붕으로 덮는 완전 밀폐형 구조가 됐고, 좌석 간격도 더 넓게 재배치됐습니다.
레스토랑도 두 곳으로 재정비했는데, 그중 ‘엘 세라미스타’는 경기가 없는 평일에도 일반 손님을 받는 상시 운영 레스토랑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스타디움을 경기일에만 여는 시설이 아니라 평일에도 수익을 내는 공간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가 읽히는 대목입니다.
구장 지붕에는 태양광 패널도 설치돼 있습니다.
구단은 이를 통해 에너지 자립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는데, 마케팅 관점에서 보면 지속가능성 메시지를 구장 운영 자체에 녹여낸 사례이기도 합니다.
VIP 공간인 ‘카살스 그록스’ 박스는 총 30개로, 에어컨과 개인 TV, 케이터링 서비스가 딸린 20인·16인·12인용으로 나뉘어 있고 남쪽 스탠드를 통해 별도 엘리베이터로 접근합니다.
관중 규모를 늘리기보다 좌석당 객단가를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공간을 재편한 흐름이 F&B와 VIP 박스 양쪽에서 일관되게 나타납니다.

사진: 구장 외벽 도자기 타일과 옛 이름 기념 명패, Wikimedia Commons(Sking, CC BY-SA 3.0) · 워터마크 없음, 라이선스 확인됨
상품(MD)과 광고 인벤토리
비야레알의 유니폼 메인 스폰서는 구단 소유주 페르난도 로이그 알폰소 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타일 기업 파메사 세라미카입니다.
구단주 개인 기업이 곧 메인 스폰서라는 점에서, 이 구단의 상업 구조는 처음부터 카스테욘 타일 산업과 떼어놓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유니폼 공급사는 스페인 브랜드 호마이고, 코카콜라·카이샤은행 등도 스폰서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습니다.
공식 매장은 구단 홈페이지 온라인 스토어와 함께 비야레알 시내 플라사 마요르에 있는 오프라인 매장이 대표 매장으로 꼽힙니다.
약 150㎡ 규모로, 경기 시작 최소 2시간 전부터 문을 엽니다.
유럽 빅클럽들의 수천㎡급 메가스토어에 비하면 소박한 규모지만, 소도시 상권 안에서는 충분히 눈에 띄는 크기입니다.
광고 인벤토리 측면에서는 구장 자체가 최대 자산입니다.
외벽의 도자기 타일 상표부터 그라운드 보드 광고까지, 앞서 설명한 십수 개 타일·세라믹 기업들이 각자의 스폰서십 단계(메인/공식/파트너)에 따라 노출 면적을 나눠 갖는 구조입니다.
한 기업이 구장 전체 이름값을 독점하는 대신 여러 기업이 비용을 분담하는 이 방식은, 개별 기업 입장에서는 진입 장벽을 낮추고 구단 입장에서는 스폰서 이탈 리스크를 분산하는 효과가 있어 보입니다.

사진: 2025-26 챔피언스리그 스쿼드, 유니폼의 파메사 세라미카 스폰서 로고, 비야레알 CF 공식 스토어 · 구단 공식 홍보 이미지
중계권과 지역 경제효과
2024-25시즌 라리가 중계권 수익 배분에서 비야레알은 5,780만 유로를 받았습니다.
이는 레알 마드리드(1억 5,792만 유로), FC바르셀로나(1억 5,650만 유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1억 820만 유로) 등 빅3에는 크게 못 미치지만, 지로나(5,560만 유로) 같은 비슷한 체급 구단들과 견주면 중위권 상단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2025-26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로 다음 시즌 배분액은 한 단계 더 올라갈 것으로 보입니다.
인구 5만 도시에 라리가·유럽대항전 경기가 정기적으로 열린다는 건 지역 경제에도 적지 않은 파급력을 의미합니다.
홈경기마다 2만 명 넘는 인파가 도시로 유입되고, 그중 상당수는 원정 팬이나 관광객으로 숙박·외식 수요를 만듭니다.
소도시치고 호텔 선택지가 많지 않다는 게 오히려 그 방증이기도 한데, 해외 스타디움 가이드 사이트들도 숙소 옵션이 많지 않으니 예산을 기준으로 골라야 한다고 조언할 정도로 관광 인프라가 아직 이 정도 수요를 다 소화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구단이 스타디움 투어, 전시관 ‘인메르시온 비야레알’ 같은 비경기일 콘텐츠를 계속 늘리는 것도 이런 지역 경제 파급력을 요일 구분 없이 넓히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구장만의 상징
비야레알의 별명 ‘엘 수바리노 아마리요(노란 잠수함)’는 팀 컬러와는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시작됐습니다.
1967-68시즌 3부 리그 승격을 다투던 시절, 엘 마드리갈(현 에스타디오 데 라 세라미카의 옛 이름) 관중석에서 배터리로 작동하는 전축을 튼 젊은 팬 무리가 비틀즈의 ‘Yellow Submarine’을 틀어놓고 “아마리요 에스 엘 비야레알(노랑은 비야레알이다)”을 따라 부르기 시작한 게 계기였습니다.
그해 팀이 실제로 승격에 성공하면서 도시 전체가 이 노래를 틀어놓고 자축했고, 이후 이 별명이 그대로 굳어졌습니다.
도자기 산업 도시에 잠수함이라는 이름이 붙은 게 이상해 보이지만, 사실은 순전히 팀 컬러(노랑)와 비틀즈 노래 제목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결과였던 셈입니다.
KBO·K리그와 비교해보면
비야레알의 사례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구단 하나가 아니라 지역 산업 전체가 구단·구장의 이름값을 함께 짊어지는 구조라는 점입니다.
K리그에도 비슷한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대기업 모기업 없이 지자체와 시민, 지역 기업들이 힘을 합쳐 운영하는 시민구단(인천 유나이티드, 강원FC, 광주FC 등)이 그 예인데, 다만 이쪽은 대체로 지분 참여나 공공 예산 지원 방식이지 비야레알처럼 여러 민간 기업이 스폰서십 단계별로 구장 이름값을 나눠 지불하는 방식은 아닙니다.
국내에도 산업단지를 낀 지역 구단(조선업 배경의 울산HD, 철강업 배경의 포항 스틸러스 등)이 있는 만큼, 그 지역 산업군 전체가 컨소시엄 형태로 구장 명명권을 나눠 갖는 방식은 한 번쯤 검토해볼 만한 모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중계권 배분 방식도 비교해볼 지점입니다.
K리그는 최근 중계권 협상을 리그 사무국이 일괄 진행해 구단별로 배분하는 구조를 강화해왔는데, 라리가 역시 리그 차원에서 일괄 협상한 뒤 구단별로 차등 배분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큰 틀은 비슷합니다.
다만 라리가는 배분 기준에 최근 성적·시청률 비중이 크게 반영돼 빅3와 중하위권 구단 간 격차가 열 배 가까이 벌어지는 반면, K리그는 상대적으로 격차가 크지 않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 우월하다기보다, 리그의 성숙도와 시장 규모에 따라 배분 철학 자체가 달라진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진: 구장 외벽의 ‘ESTADIO DE LA CERÁMICA’ 사이니지와 비야레알 시가지 전경, 비야레알 CF 공식 홈페이지 · 구단 공식 홍보 이미지
인구 5만 소도시 구단이 라리가 3위, 챔피언스리그 진출까지 이뤄낸 배경에는 이런 촘촘한 상업 구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모기업 자금 대신 지역 산업과 스폰서십을 정교하게 엮어낸 방식이, 규모는 작아도 지속 가능한 구단 운영의 한 사례로 눈여겨볼 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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