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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리그 유니폼에서 베팅업체 로고가 통째로 사라진 건 이번 시즌이 처음입니다.
2026-27시즌 개막전 그라운드를 보면서 20년 넘게 이어지던 흐름이 끝난 자리에 어떤 기업들이 들어왔는지 하나씩 찾아보다가, 유독 눈길이 오래 머문 구단이 크리스탈 팰리스였습니다.
사실 이 구단 이름이 익숙해진 건 이번 여름 이적시장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홀슈타인 킬에서 뛰던 이재성 선수 영입에 관심을 보인 프리미어리그 구단 중 하나로 크리스탈 팰리스가 거론됐고, 성사는 되지 않았지만 그 기사를 계기로 구단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다 보니 놀란 지점이 있었습니다.
이 구단이 최근 1년 사이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메이저 트로피를 두 개나 들어올렸다는 사실입니다.
2025년 5월 FA컵 결승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꺾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고, 1년 뒤인 2026년 5월에는 라요 바예카노를 꺾고 UEFA 컨퍼런스리그에서도 창단 첫 유럽대항전 우승컵을 들어올렸습니다.
164년 역사의 런던 남부 구단이 한꺼번에 겪은 변화치고는 꽤 드라마틱해서, 현직 마케터 입장에서 이 구단의 마케팅 구조를 한 번 정리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jeffwarder, 2008) · CC BY-SA 3.0, 워터마크 없음
관중과 티켓
셀허스트 파크는 1924년에 문을 연, 프리미어리그에서 네 번째로 작은 경기장입니다.
현재 수용 인원은 2만 6천 석 안팎으로, 2024-25시즌 평균 관중은 2만 5,116명을 기록했습니다.
시즌권 보유자만 약 1만 8천 명에 달해 매치데이 입장권 대부분이 시즌권으로 채워지는 구조이고, 새로 시즌권을 사려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뒤 1~2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게 재무 분석 매체 매치데이파이낸스의 설명입니다.
2025-26시즌 시즌권 최저가는 전년 대비 10% 오른 600파운드(약 106만 원)로 책정됐는데도 대기 수요가 꺾이지 않는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흥미로운 건 이렇게 늘 매진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관중 1인당 매출은 25.8파운드로 런던 소재 구단 중 가장 낮고 프리미어리그 전체에서도 네 번째로 낮다는 대목입니다.
표를 비싸게 파는 대신 오래된 팬층을 최대한 지키는 쪽을 택한 가격 정책으로 읽힙니다.
그래도 2024-25시즌에는 FA컵 우승까지 가는 여정에서 추가 홈경기가 여섯 차례나 열리면서 매치데이 매출이 1,380만 파운드에서 1,560만 파운드로 늘었습니다.

출처: Wikimedia Commons(Ashley Martin/Geograph, 2011) · CC BY-SA 2.0, 워터마크 없음
스폰서십과 광고 인벤토리 — 도박업체 시대의 종료
올여름 프리미어리그 그라운드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유니폼 앞면에서 도박업체 로고가 통째로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2005년 영국 도박법 통과 이후 2006년부터 20년 가까이 이어지던 흐름인데, 프리미어리그 구단들이 2023년에 합의한 금지 조치가 유예기간을 거쳐 이번 시즌부터 실제로 적용됐습니다.
지난 시즌까지 20개 구단 중 11팀이 유니폼 정중앙에 베팅업체 로고를 달았고 그 계약 규모만 합쳐서 1억 파운드에 달했다고 하니, 적지 않은 구단이 여름 내내 새 메인스폰서를 구하러 다녀야 했습니다.
BBC와 디애슬레틱을 인용한 국내 보도를 보면 프리미어리그 8개 구단이 이 여름에 새 스폰서를 확보했는데, 그 빈자리를 채운 건 대체로 대중 인지도를 높이고 싶어하는 테크·금융 기업들이었습니다.
크리스탈 팰리스도 그중 하나입니다.
2024-25·2025-26시즌 동안 유니폼 앞면을 채웠던 베트남계 온라인 게임업체 NET88(연간 약 1천만 파운드 규모 계약)이 물러난 자리에, 이번 시즌부터는 AI 기업 템포럴이 새 메인스폰서로 들어왔습니다.
템포럴은 오픈AI·넷플릭스·JP모건체이스·보다폰 같은 기업들이 쓰는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만드는 회사로, 이번 계약은 1군과 아카데미 팀 유니폼에 로고를 노출하는 것 외에도 구단 커뮤니티 재단인 “팰리스 포 라이프”를 통해 런던 남부 지역 청소년 대상 컴퓨터과학·AI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2022-23시즌부터는 온라인 중고차 플랫폼 cinch가, 그 전에는 또 다른 베팅업체가 이 자리를 지켰던 걸 생각하면, 스폰서 한 곳이 바뀔 때마다 그 시대 광고 시장이 어디로 돈을 옮기고 있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셈입니다.
마케터 입장에서 보면 도박 규제라는 외부 변수 하나가 리그 전체 스폰서십 지형을 이렇게 크게 흔들어놓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출처: 크리스탈 팰리스 FC 공식 홈페이지(2026.5.21 보도자료) · 구단 공식 홍보 이미지, 워터마크 없음
공간 투자 — 셀허스트 파크 메인스탠드 재개발
셀허스트 파크는 1924년생 경기장답게 상당히 낡고 비좁은 구장으로 꼽힙니다.
실제로 해외의 한 스타디움 리뷰 매체는 이 경기장을 두고 “낡고 비좁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소리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 관중석 함성이 고스란히 그라운드로 꽂힌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홈스데일 로드 스탠드 뒤편의 서포터 그룹 “홈스데일 패너틱스”가 만들어내는 함성과 깃발, 카드섹션이 규모에 비해 유독 강렬하다는 평가가 많은 것도 이런 구조와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다만 구단은 이 좁은 공간을 그대로 두지 않고 대대적인 증축에 들어갔습니다.
1924년에 지어진 메인스탠드를 3층 구조의 신축 건물로 완전히 갈아엎어, 스탠드 하나의 좌석만 5,200석에서 1만 3,500석으로 늘리고 경기장 전체 수용 인원도 2만 6천 석에서 3만 4천 석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계획입니다.
새 스탠드는 높이 41미터, 연면적 2만 5,072제곱미터(축구장 약 3.5개 넓이) 규모로 전면을 유리로 마감하고, 새 클럽숍과 박물관, 카페까지 들어설 예정입니다.
공사비는 약 2억 파운드(약 3,550억 원)로 추산되는데, 매치데이파이낸스에 따르면 이 자금은 주로 모기업 차원의 지분 투자로 조달되고 있고 2024-25시즌에만 3,750만 파운드가 투입됐습니다.
계획 자체는 2018년 처음 승인됐지만 코로나19와 재원 문제로 계속 미뤄지다가, 2026년 1월에야 부지 내 주택 매입과 철거 등 실제 공사의 첫 단계가 시작됐습니다.
경기장을 계속 운영하면서 기존 스탠드를 둘러싸는 방식으로 신축 공사를 진행한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인데, 팬 입장에서는 몇 시즌 동안 불편을 감수해야 하지만 구단 입장에서는 매치데이 수익 공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출처: 크리스탈 팰리스 FC 공식 홈페이지(메인스탠드 재개발 페이지) · 구단 공식 렌더링 이미지, 워터마크 없음
상품(MD)과 중계권, 재정 구조
상업 부문 숫자도 챙겨볼 만합니다.
2024-25시즌 크리스탈 팰리스의 상업 수익은 3,900만 파운드로 전년(3,100만 파운드) 대비 크게 늘었는데, 그중 스폰서십 수익이 1,900만 파운드, 유니폼·기념품 등 상품(MD) 매출이 1,100만 파운드였습니다.
여기에 프리미어리그 중계 분배금 1억 3,600만 파운드(2024-25시즌 12위 성적 기준)까지 더해 구단 역사상 최고 기록인 총매출 1억 9,700만 파운드를 냈다는 게 매치데이파이낸스의 집계입니다.
이번 시즌은 여기에 컨퍼런스리그 우승까지 더해져 UEFA 배당금만 약 1,000만 파운드가 추가로 들어올 것으로 예상됩니다.
눈에 띄는 건 이 정도 매출 규모를 만들어내면서도 씀씀이는 상당히 보수적으로 관리해왔다는 점입니다.
선수단 연봉 총액은 1억 1,000만 파운드로 2019-20시즌과 거의 같은 수준을 유지해왔고, 총 인건비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네 번째로 낮은 축에 속합니다.
대신 마이클 올리세(바이에른 뮌헨行, 5,000만 파운드)나 마크 게히(맨체스터 시티行), 에베레치 에제(아스널行) 같은 선수를 적절한 시점에 판 이적료 차익으로 흑자를 맞춰온 셈인데, 이런 운영 방식 덕분에 구단 지분 44.9%를 보유했던 존 텍스터가 2025년 여름 미국 사업가 우디 존슨에게 지분을 매각했을 때 매각가는 1억 9,000만 파운드, 구단 전체 가치는 4억 파운드를 훌쩍 넘는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구장만의 상징 — 이글 마스코트와 “글래드 올 오버”
셀허스트 파크에는 다른 프리미어리그 구장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전통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흰머리수리를 구단 마스코트로 두는 전통입니다.
2010년부터 2020년 여름까지는 “케일라”라는 독수리가 매치데이마다 관중석 위를 크게 돌며 날아 큰 인기를 끌었는데, 노령으로 세상을 떠난 뒤 셀허스트 파크 개장 100주년을 맞은 2024년 8월 태어난 지 4개월 된 새 독수리 “피닉스”가 뒤를 이었습니다.
2026년 8월 현재 두 살을 넘긴 피닉스는 경기 전 팬존에서 서포터들과 만나는 수준까지 훈련이 진행됐지만, 케일라처럼 그라운드 위를 나는 모습은 아직 보여주지 못했고 구단도 훈련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피닉스”라는 이름도 의미가 있는데, 1973년 당시 감독 맬컴 앨리슨이 구단 별명을 “글레이저스”에서 “이글스”로 바꾼 계기가 재에서 다시 날아오르는 불사조 같은 부활을 그린 것이었다는 점에서 착안했다고 합니다.
다른 하나는 데이브 클라크 파이브의 히트곡 “글래드 올 오버”입니다.
1968년 2월 이 밴드가 셀허스트 파크에서 콘서트를 연 것을 계기로 구단 응원가로 자리 잡았고, 지금도 홈경기 킥오프 직전이면 어김없이 이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여기에 홈스데일 패너틱스로 대표되는 서포터 그룹의 대형 걸개와 응원 도구까지 더해지면, 이 셋 모두 오랜 세월 쌓인 팬 문화라는 점에서 새 스폰서나 새 스탠드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자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처: 크리스탈 팰리스 FC 공식 홈페이지(2024.8.30 보도자료) · 구단 공식 홍보 이미지, 워터마크 없음
KBO·K리그와 비교해보면
크리스탈 팰리스를 들여다보면서 KBO·K리그와 비교해볼 지점이 몇 가지 눈에 들어왔습니다.
먼저 재정 규제 숫자가 공교롭게 겹칩니다.
UEFA는 유럽대항전에 나가는 구단의 선수단 관련 비용(연봉과 이적료 상각 등을 합친 비용)을 구단 수입의 70% 이내로 묶는 “스쿼드 코스트 비율” 제도를 두고 있는데, 매치데이파이낸스의 추산으로 크리스탈 팰리스의 이 비율은 78%로 UEFA 기준선을 웃돕니다.
그런데 K리그도 2023시즌부터 스페인 라리가를 참고한 비율형 샐러리캡을 도입해 K리그1·K리그2 모든 구단의 선수단 관련 비용을 구단 수입의 70% 이내로 묶어두고 있습니다.
규제를 만든 배경도, 적용하는 숫자도 신기할 만큼 닮아 있는 셈입니다.
다음으로는 구장 이름입니다.
셀허스트 파크는 1924년 개장 이래 소유주가 몇 차례 바뀌고 이번처럼 대규모 증축까지 거치는 동안에도 기업 이름을 붙이는 네이밍라이츠(시설에 기업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권리) 계약을 한 번도 맺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도 전주월드컵경기장이나 대전월드컵경기장처럼 지방자치단체가 소유한 구장들은 기업 명명권 없이 지명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다만 크리스탈 팰리스는 지자체 소유가 아니라 민간 구단이 소유한 구장이면서도 굳이 상업적 명명권을 팔지 않았다는 점에서 결이 조금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소유 구조입니다.
크리스탈 팰리스는 텍스터·해리스·블리처·패리시 등 여러 주주가 지분을 나눠 갖는 컨소시엄 형태로 운영되어 왔고 이번에 텍스터 지분만 따로 매각되는 방식으로 지분 구조가 바뀌었는데, 국내 프로구단 대부분이 단일 모기업이 지분 전량을 갖는 구조라는 점과 비교하면 이런 식의 부분 지분 매매가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도박 규제 하나가 스폰서 지형을 바꾸고, 우승 두 번이 증축 공사에 속도를 붙이고, 지분 매각 하나가 구단 가치를 다시 매기는 과정을 한꺼번에 들여다보니, 지난 1년 사이 크리스탈 팰리스만큼 마케팅 관점에서 볼거리가 많았던 중위권 구단도 드물지 않았나 싶습니다.
앞으로 새 감독 피에르 사주 체제에서 이 상승세가 이어질지, 그리고 새로 올라간 유로파리그 무대가 상업 수익에 또 어떤 변화를 만들지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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