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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 라리가 개막을 앞두고 눈길을 끄는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세비야를 연고로 한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가 2005-06시즌 이후 21년 만에 UEFA 챔피언스리그 무대를 다시 밟게 됐다는 소식이었는데, 정작 이 팀은 자기 집이 아니라 옆 동네 올림픽 경기장을 빌려 그 챔피언스리그를 치릅니다.
오랫동안 홈으로 써온 에스타디오 베니토 비야마린이 통째로 공사장이 됐기 때문입니다.
현직 마케터로서 이 대목이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보통 새 구장이나 리모델링 이야기는 “완공 후”의 장밋빛 그림만 다루기 마련인데, 베티스는 공사 기간 내내 임시 거처에서 마케팅과 매출을 이어가야 하는 훨씬 현실적인 숙제를 떠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Betis Girona 23 nov 2025 003.jpg, 작가 Anual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관중과 티켓
레알 베티스는 2025-26시즌부터 임시 홈구장으로 세비야 북쪽 이슬라 데 라 카르투하에 있는 에스타디오 올림피코(통칭 라 카르투하)를 쓰고 있습니다.
199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위해 지어진 이 경기장은 원래 육상 트랙이 있는 다목적 시설이었는데, 2025년 리모델링을 거치며 트랙 위까지 관중석을 새로 깔아 축구 전용에 가까운 구조로 바뀌었고 구단 공식 발표 기준 수용 인원은 7만 명입니다.
원래 홈구장인 베니토 비야마린이 약 6만 석 규모였던 걸 감안하면, 임시 거처가 오히려 원래 집보다 1만 석 가까이 넓어진 셈입니다.
실제 성적표도 나쁘지 않습니다.
2025-26시즌 라리가 19경기에서 평균 5만7427명이 입장해 라리가 전체 3위 관중을 기록했고, 최다 관중은 6만7447명, 최소 관중도 4만5318명으로 시즌 누적 관중이 109만1110명에 달했습니다.
시즌권을 보유한 소시오(회원)는 5만741명이고, 구장이 넓어진 만큼 앞으로 소시오 시즌권 규모를 최대 5만5000명까지 늘릴 여지도 생겼다고 합니다.
다만 좋은 얘기만 있는 건 아닙니다.
소비자단체 파쿠아(FACUA)는 거동이 불편한 관람객을 위한 좌석 배치가 앞줄 관중이 일어서면 시야를 가리는 구조라며 지난해 10월부터 문제를 제기해왔는데, 구단 쪽은 “경기장 소유주가 우리가 아니라서 손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개선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임차인이라는 처지가 마케팅에는 유리해도 시설 개선에는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티켓 판매는 회원 우선구매 이후 일반판매로 넘어가는 단계별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데, 챔피언스리그 복귀로 세비야 더비나 레알 마드리드, FC바르셀로나 원정 매치 같은 인기 경기는 일반판매 단계까지 물량이 남는 일이 이제 거의 없을 걸로 보입니다.

공간 활용과 F&B
라 카르투하는 애초에 축구장이 아니라 종합 스포츠 시설로 지어진 곳이라, 원래 홈구장 주변 헬리오폴리스 지역처럼 경기 전후로 들를 만한 동네 술집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 빈자리를 채운 게 경기장 바로 옆 대형 공원인 파르케 델 알라미요입니다.
구단은 이 공원 남쪽 골대 쪽에 푸드트럭과 라이브 공연이 있는 공식 팬존과 임시 매장을 차려놓았고, 팬들은 경기 몇 시간 전부터 이곳에 모여드는 새로운 사전행사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면 스페인 법령상 무알콜 맥주(0.0%)만 판매되기 때문에, 진짜 맥주 한잔은 입장 전에 공원이나 인근 알라메다 데 에르쿨레스 거리의 바에서 해결해야 합니다.
세비야 현지 정보를 다루는 한 여행 가이드 사이트는 라 카르투하가 도심에서 다소 떨어져 있고 경기장 인근에 상업시설이 적은 대신, 킥오프 직전 스피커 없이 관중 7만 명이 육성으로만 부르는 구단 응원가가 “유럽 어느 구장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소름 돋는 순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현직 마케터 입장에서 이 대목이 특히 흥미로웠는데, 편의시설이 부족한 임시 구장이라는 약점을 구단이 억지로 감추려 하기보다는 공원이라는 도시 공공공간 자체를 팬 경험의 무대로 끌어들여 활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완공 후 베니토 비야마린으로 돌아가면 이 야외 팬존 문화가 사라질지,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 잡을지도 지켜볼 대목입니다.
상품(MD)과 광고 인벤토리
유니폼 메인스폰서는 중국 가전업체 그리(GREE)입니다.
2024년 7월 31일부터 2027년 6월 30일까지 3시즌 계약을 맺었고, 로고는 성인 남자 1군은 물론 풋살팀과 여자축구팀 유니폼에도 함께 들어갑니다.
메인스폰서 자리만 놓고 보면 베팅업체 베트웨이가 달았던 자리는 스페인 정부가 2021년부터 구단 유니폼의 베팅업체 광고를 금지하면서 통신사 파인네트워크로 넘어갔고, 이후 2024년 지금의 그리로 바뀌었습니다.
참고로 같은 기간 등 뒤쪽 자리에는 블록체인 기업 빗치닷컴과 트레이딩 플랫폼 레거시FX가 거쳐 갔는데, 도박·암호화폐 등 고위험 업종 스폰서가 자주 들고 나는 스페인 축구 스폰서십 시장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참고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같은 종류의 베팅업체 유니폼 광고 금지를 이번 2026-27시즌부터 시행한 걸 감안하면, 스페인은 이 흐름을 5년 먼저 겪은 셈입니다.
그리 외에도 스포츠 뉴스 플랫폼 메리트킹(터키 갈라타사라이와의 계약이 끝난 직후인 2024년 10월 새로 체결), 맥주 브랜드 크루스캄포, 은행 카이샤방크, 자동차 브랜드 볼보, 코카콜라, 정유사 렙솔, 시계 브랜드 모리스 라크로와, NFT 플랫폼 소레어까지 카테고리가 다른 파트너사 10곳 넘게가 후원사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광고 인벤토리 구성이 꽤 다양한 편입니다.
상품(MD) 쪽에서는 챔피언스리그 복귀에 맞춰 3rd 유니폼에 UCL 전용 패치를 붙인 별도 에디션(14만1000원)을 내놓은 게 눈에 띕니다.
국내에서 구단 소유와 무관한 제3자 기업이 정식 대가를 치르고 이름을 붙이는 경우는 구장보다는 구단명 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키움증권과 키움 히어로즈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그리와 베티스의 관계도 비슷한 성격입니다.
소유주 가문이나 계열사가 아니라 순수하게 마케팅 목적으로 계약한 외부 기업이 유니폼 전면을 사들인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shop.realbetisbalompie.es 공식 온라인 스토어 캡처 · 구단 공식 상품 이미지
중계권과 지역 경제효과
베티스의 챔피언스리그 복귀는 라리가 5위로 시즌을 마친 뒤, 스페인이 UEFA 협회 계수 순위에서 상위권에 들며 추가로 확보한 유러피언 퍼포먼스 스팟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리버풀과 함께 잉글랜드·스페인 두 나라가 나눠 가진 이 추가 티켓 덕분에, 베티스는 정규 시즌 4위 안에 들지 않고도 21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조 리그 단계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챔피언스리그는 유로파리그나 컨퍼런스리그와는 중계권·상금 규모 자체가 다른 대회라, 정확한 배분액은 시즌 성적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구단 매출에서 방송·상금 수익이 차지하는 비중이 눈에 띄게 커질 걸로 예상됩니다.
한편 원래 홈구장인 베니토 비야마린 재건축 공사는 예산이 계속 불어나는 중입니다.
2025년 여름 공사를 시작할 당시 구단은 사업비를 1억5000만유로(약 2450억원) 안팎으로 예상했는데, 자재비 상승과 인력난이 겹치면서 지난해 11월 기준으로는 최대 2억유로(약 3260억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습니다.
완공되면 메인스탠드 격인 프레페렌시아(Preferencia) 스탠드가 일반석 1만 석과 프리미엄석 3500석을 더한 1만3500석 규모로 새로 들어서고, 그 옆에는 호텔·클리닉·컨벤션홀을 갖춘 복합시설이 들어서는데, 구단은 이 시설이 완공되면 순수 상업활동만으로 연간 2000만유로(약 326억원) 이상의 추가 매출을 낼 수 있을 걸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세비야 시는 부지 8800㎡와 도로 470㎡를 구단에 내주는 대신, 완공될 복합시설 안에서 약 4300㎡(추정가치 950만유로, 약 155억원 상당)를 시 소유로 확보하는 방식으로 사업비를 보전합니다.
애초 구단은 2시즌만 라 카르투하에서 지내고 2027-28시즌에는 새 구장으로 복귀할 계획이었지만, 시공사 선정 입찰이 무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난해 11월 구단 스스로 최소 3시즌 체류가 유력하다고 인정했고, 올해 8월 기준으로는 공사가 최소 2028년 5월까지 이어질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임시 거처 생활이 애초 예상보다 훨씬 길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참고로 라 카르투하는 베티스 소유가 아니라 안달루시아 주정부(40%)·스페인 중앙정부(25%)·세비야 시(19%)·세비야 도(13%)에 베티스와 세비야 FC가 나머지 3%를 나눠 가진 다층적 공공 컨소시엄 소유 시설입니다.
2030년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공동개최 월드컵 경기장으로도 이미 확정된 곳이라, 베티스의 임시 거주는 결과적으로 이 경기장의 월드컵 준비 일정과도 맞물려 있습니다.

출처: Estadio Benito Villamarin 2016001.jpg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구장만의 상징 — 스피커 없이 부르는 응원가
베티스 팬을 부르는 “베티코(Bético)”라는 말에는 오랜 역사가 있습니다.
세비야 시내 중산층 팬들이 주로 응원하던 라이벌 세비야 FC와 달리, 베티스는 노동자 계층의 지지를 기반으로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지더라도 베티스 만세(Viva el Betis manque pierda)”라는 구호가 생겨났습니다.
1950년대 구단 사정이 최악으로 치닫던 시절 나온 말인데, 지금도 베티코를 상징하는 문구로 쓰이고 있습니다.
라 카르투하로 옮긴 뒤에도 이 정서는 그대로입니다.
특히 킥오프 직전 스타디움 스피커를 끄고 관중 전체가 육성으로만 구단 응원가를 부르는 순서는 임시 구장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장면으로 꼽힙니다.
현지 매치데이 정보를 다루는 한 사이트는 이 순간을 “유럽 어느 구장의 응원가와 비교해도 소름 돋기로는 뒤지지 않는다”고 소개했는데, 벤치마킹 자료를 훑어보면서도 이 대목만큼은 문장 너머로 현장감이 전해질 정도였습니다.
KBO/K리그와 비교해보면
라 카르투하처럼 지방정부·중앙정부·지자체가 지분을 나눠 가진 공공 컨소시엄 소유 구장은 국내에도 낯설지 않은 구조입니다.
다만 국내 지자체 소유 구장은 대부분 연고 구단이 계속 그 자리를 지키는 걸 전제로 설계되는 반면, 베티스처럼 원래 쓰던 구장을 통째로 비우고 옆 동네 공공 경기장을 3년 가까이 빌려 쓰는 방식은 국내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해법입니다.
리모델링 기간에도 팬 기반과 매출을 지켜야 하는 국내 구단 입장에서, 공사 기간 동안 어디서 어떻게 홈경기를 치를지에 대한 참고 사례로 삼을 만합니다.
소시오(회원) 제도 역시 K리그 일부 시민구단의 회원제와 닮은 구석이 있지만, 시즌권을 가진 소시오만 5만 명을 넘는 규모는 국내 어느 구단도 아직 도달하지 못한 팬층의 두께를 보여줍니다.
광고 인벤토리 쪽에서는 그리처럼 구단 소유주와 무관한 외부 기업이 유니폼 메인스폰서 자리를 사들이는 구조가, 국내에서는 구장이 아니라 구단명에 제3자 스폰서를 붙이는 키움 히어로즈식 모델과 비슷한 결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공교롭게도 국내에도 이와 꼭 닮은 사례가 곧 시작됩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잠실 스포츠·마이스(MICE) 복합개발 사업에 따라 잠실야구장은 이번 2026시즌을 끝으로 철거되고, LG 트윈스와 두산 베어스는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개 시즌 동안 바로 옆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을 대체 야구장으로 씁니다.
2031년 말에는 3만5000석 규모의 돔구장으로 다시 태어날 예정입니다.
다만 방향은 베티스와 정반대에 가깝습니다.
대체구장으로 확정된 올림픽주경기장은 안전을 이유로 1~2층 위주 1만8000여 석부터 시작해, 관람 안전이 확인되는 대로 3층까지 열어 3만 석 이상으로 단계적으로 늘려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현재 잠실야구장 좌석(2만3750석)보다 오히려 좁게 시작하는 셈입니다.
반면 라 카르투하는 처음부터 원래 구장보다 넓은 7만 석 규모로 문을 열었습니다.
두 사례를 나란히 보면 임시 거처의 관람 규모를 처음부터 최대치로 여는 쪽과 안전을 검증하며 단계적으로 늘리는 쪽이라는 서로 다른 리스크 관리 방식이 드러납니다.
5시즌이나 이어질 임시 구장 체제에서는 관중 규모를 어떻게 설계하느냐가 곧 그 기간의 매출과 팬 경험을 좌우한다는 점에서, 국내 구단과 지자체가 함께 참고할 만한 비교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공사 중인 집을 떠나 남의 집에 얹혀사는 시즌이 이렇게 길어질 줄은 베티스도 예상 못 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관중 수는 오히려 늘었고, 팬들은 공원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고, 챔피언스리그라는 큰 무대까지 돌아왔습니다.
구장 하나가 없어도 브랜드와 팬덤은 다른 방식으로 자랄 수 있다는 걸, 베티스의 지난 1년은 보여주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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